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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축하곡 재즈 악보 +연주

sssss2926 2021. 10. 23. 22:46

생일축하곡 재즈 악보입니다. 아래에 파일이 있습니다.


재즈(Jazz)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미국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에서 탄생해 20세기 초반~중반에 크게 유행한 음악이다. 유럽 악기와 음악적 틀에 아프리카의 리듬과 화성, 그리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특유의 감성이 혼합된 장르이다. 연주를 할 때는 정형화된 음악이라기 보다는 즉흥적인 면이 강하다. 미국에서 탄생한 장르이며 초창기에는 흑인과 백인의 인종을 초월한 미국인을 위한 음악이었다. 1980년대 후반, 제100회 미국 의회 회의에서 재즈를 ‘희귀하고 귀중한 미국의 국보’로 지정했다. 다만 재즈가 유행함에 따라 세계적으로 퍼지고 전 세계 민속 음악과 결합되어 갈래가 늘어나면서 현재로선 미국이 재즈의 시작지일지언정 재즈가 미국의 민속음악이라고만 보기엔 경계가 상당히 애매해졌다. 이는 상술했듯 즉흥적인 면이 강하다 보니 딱히 그 나라에 맞춰지는 형식같은게 없기 때문, 그만큼 작곡하는 측이나 연주하는 측이나 제대로 하기엔 난이도가 높은 장르로도 유명하다.

음악적인 특성으로는 유럽 클래식, 집시 음악, 블루노트/블루스 등의 스탠다드곡과 블루스 스케일 기반의 즉흥성(Improvisation), 당김음(Syncopation), 스윙(Swing)리듬 등의 여러 음악적 요소가 합쳐져 있다.

주요 사용악기에는 드럼, 콘트라베이스, 첼로, 피아노, 기타, 색소폰, 클라리넷, 트럼펫, 트럼본 등이 있다.
2. 탄생 배경[편집]
프랑스가 미국에게 루이지애나 주를 판매하면서 내건 조건이 크레올의 평등대우에 대한 조건이었고, 이 덕분에 루이지애나 주에 있는 크레올들은 백인들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크레올들은 서양음악과 악기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특히 미시시피강 유람선에서 여흥을 제공하는 역할을 크레올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 유럽 음악의 틀 안에서 흑인 음악과의 결합이 이뤄졌다고 한다.

크레올이 아닌 일반적인 노예 흑인들의 경우 매주 일요일 교회에서 영가(靈歌, Negro Spiritual 혹은 Gospel song)를 배울 수 있었다. 이 영가들은 흑인들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서부 아프리카 음악의 특성[11]과 결합되어 래그타임[12] 등의 아프로-아메리칸 음악이 형성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하지만 서아프리카 음악이 유럽음악과 결합되어 재즈가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일반적 견해와는 달리 실제로는 재즈와 서아프리카는 관계가 거의 없다는 주장 역시 있다. 드러머 아트 블레이키(Art Blakey)는 실제로 서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여행한 뒤 아프리카와 재즈가 관계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재즈는 아프리카보다는 동유럽의 집시음악에 더 유사함을 느낄 수 있다. 아프리카와 유사성을 띠는 것은 자메이카 등 카리브나 중미의 나라들의 음악이다. 때문에 아프리카와 별개로 남부 흑인 노예들이 아메리카로 끌려온 뒤 독자적으로 발생한 장르라고 봐야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것이다.

대신 오늘 날의 재즈가 아프리카 음악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는데, 1960년대 이래 흑인 민권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흑인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겠다는 자각의 일환으로 아프리카 음악을 배우면서 재즈에 응용했기 때문이다. 특히 오넷 콜먼을 비롯한 프리 재즈 아티스트들은 아프리카 음악 특유의 복잡한 폴리리듬과 혼합박자, 음계를 도입해 그 동안의 재즈 조류를 거스른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음악을 추구했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현지 출신의 재즈 아티스트들도 방향성은 좀 달랐지만 비슷하게 아프리카 음악을 토대로 한 그들만의 재즈를 만들었다.

남북전쟁 이후 흑인 노예해방이 이루어 지면서 먹고 살 길을 찾아야만 했던 흑인들이 도시로 모여들어 빈민계층을 형성한다. 이후 1910년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이 흑인들은 입대를 하여 군 복무를 마친다. 뉴올리언스는 당시 해군기지가 있었는데, 항구를 따라서 해군들을 주 고객으로 하는 윤락가와 술집이 잔뜩 들어서 있었다. 그 지역은 당시 해군기지 사령관의 이름을 따서 스토리빌이라 불렸다. 전쟁 후 전역한 군악대 출신 흑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봐야 고된 노동만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스토리빌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직업은 윤락업소 내의 밴드뿐이었다. 그들이 연주하던 음악이 초창기 재즈를 이루었다.

또다른 설로는 미국과 쿠바의 전쟁, 남북전쟁이 끝나면서 군인들이 두고 간 군악대 악기들이 뉴올리언스에는 엄청나게 쌓여 있었고 동네 사람들이 남겨진 악기들을 마구 갖고놀게 되면서 재즈 즉흥연주(Improvision)이 시작되었다는 말도 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것이 초창기 재즈는 길거리 행진곡 풍인 마칭밴드 형태도 많았다. 그리고 사용되는 악기들 대다수가 군악대에서 쓰이는 목관, 금관악기와 타악기인 것도...[13]

재즈의 기본음계 중 블루스 음계가 많을 정도로 두 장르는 영향을 많이 주고 받았다. 재즈의 요소중 하나인 '부르고 응답하기(Call and Response)' 와 3개 소절로 이루어진 굉장히 우울한 음악을 연주했는데 이는 블루스의 기원이며 장례행렬 또한 앞서 설명한 마칭밴드형태의 재즈 브라스 밴드의 행렬이 이어졌다고 한다. 미국 흑인 차별문제는 노예해방 이후에도 굉장히 심각했고 1930년대까지도 사보이 볼룸이 있던 미국 뉴욕 곳곳에도 White Only라는 글자의 상점들이 거리 곳곳에 있을 정도 였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모던재즈의 시대를 연 찰리 파커 또한 흑인차별을 겪은적이 있을 정도다.

뉴올리언스에서 발생한 초기 재즈를 초창기 재즈 (Early Jazz)라고 부르는데 앞서 설명한대로 흑인들의 음악이었다, 그러나 백인들까지 이음악에 매료되어 재즈음악을 따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를 딕실랜드(Dixieland) 재즈라고 한다. 재즈밴드가 백인과 흑인 혼성으로 되어 있거나 아예 백인들로만 구성된 재즈밴드들이 나오게 된다.

재즈의 명칭에 대해서는 그 유래가 분분한데, '재스(Jass)', 발레의 한 동작인 '채즈(Chaz)'부터 어느 유명한 재즈 연주자의 이름이 변형되었다는 설까지 그야말로 무수하다. 피아니스트인 젤리 롤 모턴(Jelly Roll Morton)은 자신이 재즈를 '발명'했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재즈라는 단어가 초창기에 성적인 단어였음을 암시하는 당시의 신문기사들이 발견되기는 했으나[14] 이 또한 추측에 불과하다.
3. 간략한 역사[편집]
3.1. 재즈의 태동, 초창기 재즈(딕실랜드)[편집]


오리지널 딕실랜드 재즈 밴드(Original Dixieland Jazz Band) - Jazz me Blues (1921)
루이 암스트롱 앤드 히스 핫 바이브 (Louis Armstrong and his Hot Five) - Fireworks (1928)
뉴올리언스(초창기 재즈)에서 1910년부터 1920년 사이에 재즈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는데, 이 때 재즈의 형식과 스타일[15]을 잡은 인물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 킹 올리버, 버디 볼든등이 있다. 또한 자유분방하고 끝없이 긴 연주를 했(다고 전해지)던 음악가들이 이때부터 녹음 기술이 등장함에 따라 레코드의 길이에 맞추기 위해 짧아지고, 솔로 연주도 음반에 고정되어 담게 되면서 재즈의 체계화와 보급이 슬슬 시작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트럼펫을 가진 꼬마들이 명연주자의 음반을 집에서 듣고 따라하게 되면서 재즈의 즉흥성이 시작되었다.

1920년대 재즈는 미시시피 강을 따라서 캔자스 시티, 시카고 등으로 번져나갔다. 이 중 특히 시카고 스타일은 초창기 재즈의 주요한 스타일 중 하나였다. 래그타임, 딕실랜드 재즈, 찰스턴 리듬의 재즈 등이 혼재되었으며 스윙재즈 스타일로 조금씩 진화되기 시작했다.
3.2. 스윙 시대[편집]


듀크 엘링턴 -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 (1931)
베니 굿맨, 플레쳐 헨더슨 - Sugar Foot Stomp (1937)
1930년대에는 재즈의 중심이 뉴욕으로 이동되었으며, 빅밴드가 연주하여 흥겹게 춤(스윙댄스, 찰스턴 댄스 등)출 수 있는 스타일의 빅 밴드 스윙재즈가 큰 인기를 얻게 되는데, 이 때 이 스윙재즈의 확립에 영향을 미친 인물은 베니 굿맨과 글렌 밀러이다. 이 스윙재즈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행이 되어 재즈가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뮤지션들이 활동했던 사보이 볼룸, 코튼 클럽, 민톤스 플레이 하우스, 버드랜드, 블루노트, 아폴로 극장 등 수 많은 홀들이 뉴욕에 있었으며 일부는 현재까지도 영업 중이다.

기타 사항으로 랩소디 인 블루라는 곡 또한 이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조지 거슈인이 1924년 작곡한 재즈풍의 클래식 곡으로 클래식 진영에서 재즈풍의 곡 제작을 시도한 사례도 있다.
3.3. 정열의 비밥[편집]


디지 길레스피 (feat. 찰리 파커) - A Night In Tunisia (1945)
찰리 파커 - Yardbird Suite (1946)
1940년대에는 연주자들을 중심으로 재즈를 댄스홀 음악이 아닌[16] 음악 그 자체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하는 실험이 시작된다. 그 결과 연주자들은 소규모 밴드(주로 3~5명)를 형성하여 음악가들을 위한 음악을 연주한다. 여기서 이러한 배경음악에 불과하던 재즈의 스타일을 완전히 바꿔놓으며 우리가 오늘날 듣고있는 감상중심의 재즈로 만든 불세출의 천재 찰리 파커가 등장해 비밥을 발명했다. 밥 재즈(Bop Jazz)라고도 하며 이 시기에 Swing Era가 끝이 나고 모던재즈의 시대가 시작된다[17], 그의 등장으로 인해 미국의 유행가 정도의 위상이었던 재즈는 20세기 음악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음악장르, 예술장르로 격상된다. 재즈애호가들도 그의 음악적 스타일에는 호불호가 갈릴지 모르나, 적어도 영향력과 파급력 측면에서는 파커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듣고있는 재즈도 없었을것이라는데 공감하는 사람이 많을정도. 이 시기의 재즈를 Bebop(카우보이 비밥의 그 비밥이 맞다.)이라고 부르며, 이 시기에 많은 대형 뮤지션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흔히 재즈 하면 떠오르는 음악들은 주로 여기에 속한다.

아래 'NHK 재즈다큐멘터리 모던재즈의 탄생' 영상에서 1920년대~30년대 스윙재즈에서 비밥 탄생
시기까지의 연대기를 한글 자막으로 볼수 있다. 사보이 볼룸, 민톤스 플레이 하우스 등 당시 명소들과 인물들에 대